2021년 의대생 신문과 함께하는 의대생 글쓰기 공모전 당선작
(주제 :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의학 전공 과목”)
십 대의 나는 수학과 과학만으로 온 세상을 설명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이치가 앞서고 법칙들이 부연하는 세상의 한 켠에서 관망하며 순응하는 것이 그 일원으로서의 충분한 역할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실제로 그 생각은 큰 힘이 들지 않았으며 곧잘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크게 의심할 여지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했다. 돌이켜보면 항상 새로운 과목을 배울 땐 시야가 한 칸 더 넓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줄곧 사각형의 넓이를 계산하다가 π를 배우고 나서는 원의 넓이를 계산할 수 있었고, 미분 적분을 배우고 나서는 구불구불한 직선 아래의 면적조차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칸씩 세상을 알아가는 중이라 생각하던 나는 마지막 남은 한 칸처럼 느껴지던 수능을 보게 되었고, 의대 합격 통보를 받고 나에게 조금의 특이점이 찾아온 듯했으나, 그 또한 이내 예과 시절을 보내면서 어느새 흐려지곤 큰 고민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2학기가 되고 처음으로 의학 영어를 배우면서 조그만 물결이 일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귀여울 정도의 공부였으나, 쏟아지는 단어들에 정신 못 차리며 힘들어하는 새내기 시절의 나에게 교수님이 싱긋 웃으시며 ‘내년 되면 어떡하니 이제~’하시며 지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흐르듯이 살아가며 처음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던 예과생은 월요일마다 무사히 졸업을 기원하며 괴로워했다. 눈앞의 진급과 성적을 위해 밀어 넣듯 단어들을 받아들여 결국 진급에 성공한 새내기는 또다시 난관을 맞이하였다.
입시 때처럼 큰 생각 없이 하나씩 헤쳐나간 과목들을 제치고, 코로나가 터지며 정신없이 시작된 새 학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해부학이었다.
시간표의 과목 이름을 확인하며 이제 조금씩 내가 의대를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성적과 공부량에 대한 고민만을 반복하던 나. 해부 실습을 한다며 실습복을 받아들 때까지도 사이즈를 잘못 산 건 아닌지, 명찰을 어떻게 다는 것이 맞는 것인지 고민만 하던 철없는 의대생은 첫 실습시간, 해부 실습실에 들어선다.
스무여 해를 살아가던 동안 자신했던 이치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있는 현상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었을까.
그저 실습이 있었고, 실습에 참여하고 수업을 받기 위해 자리에 도착해 입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엔 그 문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하얀 천과 반투명한 비닐 안을 통해 살짝 보였던 발,
그 발을 보고 난 그 자리에서 돌아서 실습실을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일까. 내가 지금 어떤 곳에 있는 것인가.
차근히 난 이때까지 나의 삶의 방식대로 하나씩 생각해보았다.
난 의대생이다, 난 해부학 강의를 듣는다, 지금은 해부학 실습시간이다,
해부란 인체를 탐구하는 과목이다.
그렇구나,
난 지금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려 와있는 것이구나.
심장이 귀 안쪽을 마구 밀쳤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목구멍을 식히려 연신 침을 삼키자
내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내가 고작 남들과 다른 것 하나는 그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마음껏 계산하고 답을 낸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입시가 끝났고 그다음 단계에 들어온 것뿐인데 나는 어느새 누군가의 죽음 다음 단계에서 그 삶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머릿속이 멍해지고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끌리듯이 들어간 실습실에서 어떻게 첫 실습을 마쳤는지 아직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스키닝을 하고 처음으로 지방과 근육을 보았다.
근육은 muscle, 사람의 움직임을 담당한다.
아마 7살 때부터 줄곧 알아온 지식이었다.
trapezius, 작년의 내가 쉼 없이 밀어 넣던 많은 단어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럼 난 이전과 같은 나일까?
왜 나는 처음으로 일렁이는 바다를 본 육지의 사람처럼 무력감에 휩싸인 채 멍하니 서 있는 걸까.
해부학은 나에게 새로운 지식이 아니었다.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 문이었다.
새로운 공식과 방법으로 종이에 그려진 도형의 넓이를 계산할 줄만 알던 나는 고개를 들어 공간을 바라보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한껏 점선과 사선으로 입체를 흉내 내도 종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그해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매일 의사의 자격을 하나씩 떠올리며 끊임없이 내가 그 범주에 속할 수 있는 법을 생각해내야만 잠이 오곤 했다.
그렇게 그 한해가 지나가고 이듬해, 나는 난생처음 블록이란 것을 맞이하게 되었다.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몰아치는 시험 속에 어느새 과목들을 건너가 있는 내가 보였다.
처음으로 폐 x-ray 사진을 봤을 때는 다른 점을 찾기 위해 매직아이를 하듯 하염없이 사진을 두고 쳐다보기도 하고, 처음 심전도를 보았을 때 이 작은 티끌이 얼룩이 아니라는 것에 연신 놀라기도 했다.
매번 이번 블록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이번 블록은 너무 재밌고 잘 맞았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런 자잘한 생각들을 반복하며 좌절하고 기뻐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일 시험 보는 범위를 오늘 강의를 듣는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불안해하던 나는 어느새 익숙한 듯이 밤새고 수업을 들으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익숙해진 저 수평선처럼, 일상이 되어버린 파도 속에서 나는 이따금 그 처음을 떠올린다.
바다를 마주한 채 어쩔 줄 모르던 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