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보고 꽃이 되라 한다

김 진
KAMC 포상위원장,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김진 KAMC 포상위원장,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나는 가을이 좋다. 살랑이는 시원한 바람과 단풍을 품은 갈색의 산과 피부에 느껴지는 햇빛의 따사로움도 좋지만, 풍성한 과일과 내가 좋아하는 신선한 은행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더욱 좋다. 이러한 계절이 몇 년 전부터 마냥 즐겁지 만은 않다. 매년 이 맘 때면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혹시나´하는 기대가 ´역시나´로 끝나기 때문이다. 올해는 ´0대 21´이라는 한·일 간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수의 선정적인 매스컴의 비교와 중국인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소식으로 마음 한구석이 싸하다 못해 춥다.

메이지 유신 때부터 기초연구에 꾸준히 투자를 하여온 일본과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를 직접 비교하면서 초조해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나라가 기초연구에 의미 있는 투자를 시작한 것이 고작 1990년대 초이고 의학계도 이때부터 이러한 연구비를 기반으로 전일제 대학원생들과 함께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이 발행한 우리나라 의학연구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의학평가보고서인 '2006보고서'와 '한국의학연구업적보고서 2010'에 의하면 연구비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한국의학 SCI 발표 논문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1974년 3편에 불과하던 SCI 발표 논문 수가 1995년 1,882편으로, 2009년 18,776편으로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또한 과학기술계 분야 중에서 의학 논문의 비중이 1995년 8.8%에서 2007년에는 17.6%로 성장하여 우리나라 과학분야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SCI 논문 수를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으로 구분하여 비교하여 보면, 1997년까지는 기초의학(51.0%)과 임상의학(49%)이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2000년 이후부터 임상의학의 논문 수가 기초의학에 비해 가파르게 증가하였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의 누적논문 수를 비교하여 보면 기초의학의 논문이 임상의학 논문의 74.2%, 2005년부터 2009년까지의 누적논문 수는 62.2%로, 2009년 한 해만 비교하여 보면 56.1%로 그 격차가 더욱 커져 가고 있다. 이렇게 계속 격차가 커지는 것은 기초의학 논문수의 증가 속도가 감소되어서라기 보다는 임상의학의 증가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 말까지 변변한 연구비도 없는 환경에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해 온 기초의학자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임상의학의 발전이 있었을까 반문하여 본다. 기초의학이라는 튼튼한 뿌리를 기반으로 임상의학이라는 꽃이 활짝 펼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무리일까. 근래 우리나라 연구비를 배분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논문 수와 인용된 횟수 등이다. 인용된 횟수를 많게 하기 위해서는 최근 유행하는 연구 분야여야 하고, 그런 분야에는 연구자도 많고 논문도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보건의료기술분야 육성이 새로운 국가적 아젠다로 부상하면서 임상의사들만 할 수 있는 임상연구나 중개연구분야가 확대되면서 임상의학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 그 반면 남이 하지 않는 기초 분야를 묵묵히 한 우물만 파는 기초의학자들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여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을 흔들어대니 학자들이 긴 호흡으로 연구하기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에는 단기적인 성과를 강조하면서 장기적인 기초연구는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기초의학자들에게 ´억울하면 임상의사들이 하는 응용 연구 분야를 하라´고 말 할 수는 있으나, 이는 뿌리 보고 꽃이 되라는 것과 같다. 뿌리가 꽃이 부러워 땅 밖에 나오는 순간 말라 비틀어져 죽고 꽃도 함께 죽고 만다. 거름은 뿌리에 주는 법. 의학이라는 나무의 튼튼한 뿌리가 될 수 있도록 기초의학자들이 꾸는 소박한 꿈인 ´적은 연구비라도 한 연구과제를 10년 이상 꾸준히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받을 수 있는 환경´이 현실화 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

기초의학을 포함한 기초연구 분야에서 노벨상이 진심으로 나오기를 원한다면, 노벨상이라는 상을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창적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연구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창의적인 연구가 나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패한 연구를 그 연구가 장기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 간주해야 한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실적위주의 연구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과학 그 자체에 순수하게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뿌리 보고 꽃이 되라고 강요하는 정책은 펴지 말기를 바라면서 - - - 이 가을에, 기초의학연구를 위한 정책들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