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3):COVID-19의 중심지에서 - 2020년 봄, 대구에서의 기록

코로나19 의대생 글쓰기 공모전 수상작(에세이 부문)

'우리협회는 COVID-19 확산 여파로 장기적인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의대생들에게 미친 영향을 직접 들어보고자 'KAMC 코로나19 의대생 에세이 공모전'을 시행하였습니다. 이에 지난 7월 선정된 우수작을 선보입니다.'

우수상(2) 이나영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4학년 작품명:COVID-19의 중심지에서 - 2020년 봄, 대구에서의 기록

2월 20일. 이미 한 달 전에 개강을 한 상태였고, 이론 수업을 하는 날이라 교실에 앉아있었다. 3일 전 31번 확진자가 나온 이후로 대구에서 확진자 수가 급증하여 어수선한 분위기인 와중에 실습이 계속되고 있었다. 쉬는 시간, 학장 교수님과 예방의학 교수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우리 학교 병원에 신천지에 다니던 간호사가 있었고, 접촉력을 밝히지 않은 채 출근을 하던 중에 확진이 되었다고 했다. 이미 대구 내 다른 의과대학들도 실습을 중단하였다고 하고, 병원 직원 중에 확진자가 나온 이 시점부터 실습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이 시간부로 학교를 닫는다고 말을 전했다. 얼떨떨했다. 전염병 때문에 휴교한다니. 이게 진정 2020년에 내가 마주한 현실이 맞는 걸까.

“현재 시간 이후로 임상실습을 중단합니다.”
“현 시간부터 상황 종료 시까지 교내 출입 전면 금지합니다.”
“현 시점부터 기숙사 폐쇄를 결정하였습니다.”

얼떨떨한 나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 휴대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나는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휴교한 이후로도 한동안은 본가에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학교 병원이 있는 동네는 봉사단체를 가장한 신천지 시설이 활동반경 내에 들어있었고, 걸어서 15분 거리에 아파트 전체가 코호트 격리되었던 한마음 아파트도 있고, 걸어서 20분 거리에 집단감염의 온상이 되었던 신천지 대구교회가 있는 그런 동네다. 코로나가 창궐한 동네에서 혹시나 운 없게도 누군가와 동선이 겹쳐서 가족들한테 폐를 끼칠까봐 셀프로 자가 격리 기간을 거친 후 본가로 가야겠단 생각을 했다. 매일 체온도 재서 기록을 했었는데, 37.5도가 나온 적도 있어서 조금 불안에 떨기도 했다. 그게 낮이어서 온도가 올라갔던 것인지 배란기여서 체온이 높았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몇 시간 뒤엔 체온이 다시 정상범주에 들어왔다. 괜히 예민해져서 작은 일도 크게 다가오는 시기였다.

코로나 사태 초기에는 선별진료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서 곧바로 응급실로 향해 응급실을 폐쇄시키는 상황을 초래했다. 응급실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바로 윗학년 선배들이 응급실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다른 병원에서도 근무하고 있던 친구가 있던 터라 상황이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중앙응급의료센터의 종합상황판을 보면 응급실 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생각날 때마다 확인했다.

“응급실 폐쇄상태입니다.”
“현재 응급실 폐쇄상태로 상황 변화시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진료불가능메세지. – [심근경색의 재관류중재술] 불가능합니다.
진료불가능메세지 – [ 뇌경색의 재관류중재술 ] 불가능합니다.
진료불가능메세지 – [ 담낭담관질환 ] 불가능합니다.
진료불가능메세지 – [ 위장관응급내시경 ] 불가능합니다.
진료불가능메세지 – [ 산부인과 응급 ] 불가능합니다.
진료불가능메세지 – [ 응급투석 ] 불가능합니다.

대구에는 4개의 대학병원이 있는데, 한 군데 빼고 세 곳이 닫혀 있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응급의료체계 마비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한 화면 가득 압도하는 붉은 칠을 한 진료불가능 메시지에 숨이 턱 막혔다. 뇌혈관이 터지는 것은, 심장관상동맥이 막히는 것은, 장이 꼬이는 것은, 태반이 박리되는 것은, 시기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런 응급상황들은 코로나라는 재난 상황을 고려해주지 않는다.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면 살았을 생명들이 꺼져가는 상상에 현 시국의 상황이 두려워졌다. 지금 이 시기가 아니었다면 살았을 운명들이 길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의료가 아무리 발전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한 인간으로서 무력감과 허탈감이 들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자영업자들은 가게를 닫고, 누구에게 어떻게 감염이 될지 모르는 공포 속에, 응급실은 폐쇄가 되고, 의료체계가 마비되어가는 모습. 내가 겪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이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감염자들이 수용범위를 넘어서면서 난리가 난 우한이나 이탈리아의 케이스가 오버랩 됐다. 매일매일 치솟는 확진자 수에 이러다 정말 의료 시스템이 아예 마비가 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되었다.

“삐—익! 삐—익!!” 고막을 찢는 듯한 재난 경보음 소리는 일상이 되었다. 하루에 서너 번씩은 경보음이 시끄럽게 휴대폰에서 울려댔다. 대구광역시청, 중구청, 남구청, 달서구청. 여러 곳에서 휴대폰에 경보음을 울려줬다. 다른 지역은 확진자 동선을 문자로 보내주는 것으로 들었는데 대구는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동선을 파악할 인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확진자를 수용할 음압 병실도 부족한 상황이어서 대구광역시 내의 가용 자원을 최대한 끌어다써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로 인해 다른 도시의 음압 병실을 빌려쓰기 위해 환자를 타지역으로 수송해야했고, 확진자로 판명되었음에도 입원 대기를 한다는 얘기에 사람들의 불안은 더 커져갔다.

공포가 엄습하는 와중에 대구에 있는 사람들은 출근을 해야했으며 일상을 살아가야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구 여행력’만 있어도 모든 것이 설명되는 양 보도되는 것이 대구거주민으로서는 조금 염세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대구 확진자와 동선이 겹쳤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대구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개연성이 성립이 된다는 것이 조금 의아스러웠다. 타지역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 동기나 후배들에게 물어보니 대구에서 온지 2주가 지나지 않으면 아예 받아주지도 않는 곳도 있다고 했다. 대구 봉쇄라는 말이 미디어에 나오기도 했다. 사람들의 불안감은 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블루를 겪고 있었다. 어느 날은 마스크를 낀 채 동네 산책을 하다가 재채기를 한 번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전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원래도 재채기 소리가 요란한 편이긴 했지만 사람들이 그만큼 신경이 곤두서있고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매일 아침 추가된 확진자 수를 확인하고 대구광역시청에서 방송하는 정례브리핑을 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학교에서 예방의학을 강의해주셨던 교수님이 대구광역시 정례 브리핑에 나오셔서 질의응답을 받는 것을 보며 신기해했다. 예방의학을 배우면서도 그 쓰임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웠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아주 찐―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본과 4학년은 이론 수업보다는 대부분 실습으로 시간표가 채워져있는데, 몇 개 없는 이론 수업이 온라인에서 구글 MEET를 통해 진행되었다. 마침 배우는 과목이 예방의학 과목이라 공부하는 내용과 시대적 배경이 아주 적절했다. 법률 파트를 배우는데 전염병에 대한 조항이라든가 검역법에 대한 조항이 이번 코로나 사태를 실시간으로 수정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격리, 마스크 착용, 손 위생에 대한 홍보 등 다방면의 노력이 듣기 시작했는지 도저히 진정되지 않을 것 같던 확진자 수가 점점 줄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던 경보음이 잦아들었다. 4월 3일에는 확진자수가 한자리수로 떨어졌다. 4월 10일에는 확진자수 0명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통제 가능한 수준이 되자 실습이 재개되었다.

실습 시작 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증상 유무에 관계없이 PK실습생 전원에게 covid-19 검사를 시행하였다. 응급실에서 인플루엔자 검사 나가는 것만 보다가 검체 채취하는 것을 직접 겪어보니 환자들의 아픔을 느껴볼 수 있었다. 면봉이 코 안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저서 내 비강 안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입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검사를 확실히 하려고 깊숙이 찔러넣었는지 나중에 화장실에서 가래를 뱉으니 피가 섞여 나왔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하루 미만으로 걸렸는데 다들 휴교를 한 동안 손 위생을 잘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열심히 실천하였는지 모두 음성으로 판정됐다.

실습 초반에는 환자들이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코로나로 인해 외출을 자제하고 병원에 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고위험군인 고령의 환자를 대신하여 보호자가 오는 것이 한시적으로 허용이 되기도 하였고 전화 처방도 한시적으로 이루어졌다, 언텍트가 떠오르면서 원격의료 관련주의 주가가 상승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재외국민 대상으로 2년 간 원격의료가 허용된다고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발표했다. 원격의료의 포문이 열린 게 아닐까 생각이 된다. 의협에서는 반대를 하고 있지만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거기에 맞춰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 실습생의 입장에서는 많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병원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한정되어 아침에 출근할 때 돌아가야 해서 번거로워졌다는 것, 출근 전에 발열 체크를 무조건 하고 명렬표에 기록한 후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것, 하루 종일 마스크를 낀 채 실습해야한다는 것, 병원 식당에 자리마다 칸막이가 생겼다는 것, 환자를 예진할 때 손소독을 좀 더 꼼꼼히 하라는 것. 몇 가지 규칙들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코로나 전과 후의 차이가 더 체감이 많이 되는 쪽은 학교와 관련된 사항들이었다. 전과 달리 단체로 모이는 행사가 일절 취소되었으며 동아리 활동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학교의 헬스시설, 동아리방도 폐쇄되었다. 소규모로 모이는 일도 제한되었다. 신입생 대면식, 각종 동아리 총회, 본3학생들의 PK착복식, 졸업여행, 졸업앨범사진 촬영, 스승의 날 행사, 성년의 날 행사 등 모든 행사가 취소되었다. 병원 실습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본3, 본4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온라인 강의로 수업이 진행되어 학교 등교도 제한되었다. 아직도 20학번을 실제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다. 귀찮아서 참여하기 싫었던 행사들을 안 할 수 있어 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중에 추억이 될 만한 거리들이 사라져 아쉽기도 했다. 한번 맥이 끊긴 행사들이 코로나 사태 이후에도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을까.

실습이 재개된 이후 병원을 가면서 복잡한 심경이었다. 지금은 비의료인이지만 1년 내로 의료인이 될 것이었고, 의료인이 아니지만 의료 현장에 있는 애매한 신분 상태. 이 사태가 1년만 늦게 일어났어도 지금 내가 저 현장에 있었을 것이다. 학생신분이긴 하였으나 일말의 책임감을 가지고 실습에 임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최대한 실천하였고, 쓸데없는 동선을 줄였다. 헬스장이 다시 열었지만 가지 않았고 기타레슨도 잠시 그만 두었다. 친구와의 약속을 줄였고, 외식도 최대한 자제하였다. 매일 하는 발열에크에서 체온이 37.5도를 넘어간 경우 그날은 실습에 참여할 수 없다는 규칙도 생겼기 때문에 몸 관리를 더 신경 써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은 있지만 무사히 실습을 마칠 수 있기를.

미증유의 상황에서 사람들의 인식도, 의료 방역체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감염내과 강의를 들을 때 항생제 내성균의 출현, 신종 감염병의 등장과 같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었지만 그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하였었다. 기폭제가 없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뿐 조건만 만족되면 언제라도 인류에게 닥칠 수 있는 상황들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감염성 질환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코로나가 아직 대구에 상륙하기도 전 2월 초에 외부 정신병원 실습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생각에는 담당 선생님이 손위생을 몇 번이고 강조하셔서 조금 과한 처사가 아닌가 의문을 품었었다. 하지만 후향적으로 돌이켜보면 그 선생님의 선택이 맞았던 것 같다. 집단감염으로 주목받았던 정신병원, 요양병원들이 많지만 그 병원은 피해갈 수 있었다. 단순히 운이 좋아 코로나19 검사에서 전원이 음성이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전문가끼리도 의견이 갈리고 누구라도 호언장담할 수 없는 처음 맞이하는 상황에서는 좀 더 방어적으로,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