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3학년, 첫 PK실습을 시작하며 병원에 발을 디딘 이후로 1년 반이 더 지났다. KMLE 기출 문제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부족한 머리로 병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산부인과에서 지켜본 생명 탄생의 순간부터 응급의학과에서 본 소생술을 종료한 환자에게 사망 선언을 하는 순간까지. 누군가의 인생의 단편 단편들을 끌어모아 인간의 전 생애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PK 실습 기간 동안 제일 많이 한 것은 참관하기, 지켜보기, 따라다니기. 교수님 꽁무니를 쫓아가기 바빴던 시간들이지만 약 2년간 월화수목금 매일같이 병원에 출퇴근 도장을 찍으며 병원의 생태에 익숙해져갔다.
내게도 병원은 낯선 공간이었는데 너무 급속도로 적응해버렸다. 아직 의사 면허도 따지 못했지만 벌써부터 의료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교수님 뒤에서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는 것밖에 하지 않음에도 종종 환자의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지고 반복되는 질문이 지겹게 느껴졌다. 지금도 이런 상태라면 내가 의사가 되어 환자를 직접 진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본다.
낯설었던 순간을 기억하자.
나도 병원이 낯설었던 순간이 있었다. 지금은 산부인과 실습을 돌면서 외래 참관을 하면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가 진료를 받고 가는 모습을 봐서 익숙해졌지만 나도 저기 환자의 포지션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산부인과 이론 공부도 하지 않았던 무지한 때였고, 특히 처음 검진을 했을 때는 상당히 무서웠던 걸로 기억한다. 골반진찰용 치마로 갈아입는 것도 맞게 하는 건지 의문이 들고, 검사가 어느 정도로 아플지, 어느 타이밍에 검사 기구를 넣게 될지, 검사결과는 어떨지 걱정이 꼬리를 물던 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때 간호사 선생님이 해준 한마디가 긴장을 풀게 하고, 의사선생님이 이럴 때 약간의 언질을 해줬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의사에게는 수천 번도 넘게 반복해서 익숙한 진료이고 익숙한 검사여도 환자는 처음, 혹은 오랜만에 와서 낯설고 무서울 수 있음을 기억하자. 환자가 경험하는 병원과 의사가 경험하는 병원 사이의 간극을 인지하자.
교과서 한 문장에 살아있는 환자의 삶을 들여다보자.
응급실 실습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응급실에 밀고 들어오는 수송차량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트리아제로부터 응급실 입구까지 줄지어진 행렬을 보고 문득 떠오른 것은 ‘비가 오면 교통사고가 늘어난다.’는 누구나 다 아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장 속에 서있는 것이었다. 병원은 지식 한 줄이 문장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로 생생하게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외래 환자의 예진을 보았다. 내가 예진할 환자의 주소는 두근거림이었다. CPX를 연습할 때처럼 OLD CoEx CAFE를 적어 내려가고 두근거림에서 꼭 감별해야할 것들을 생각하느라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이윽고 환자가 들어왔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했던 것처럼 순서대로 병력 청취를 했다. 이제 ‘약사가외과여’의 ‘가’를 물은 참이었다. 혹시 가족들 중에 심장질환이 있었던 사람은 없는지 물었는데 그 환자는 급사의 가족력이 있었다. 환자는 아버지도 일찍이 심장문제로 돌아가셨고, 동생도 얼마 전에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지금 노모를 돌보는 건 자신뿐이라면서 어머니보다도 먼저 죽게 되면 어떻게 할지 걱정된다고 털어놓으며 눈물짓는 환자를 보며 마음이 저렸다. ‘급사의 가족력이 있다.’ 이 한 문장이 주는 무게가 이런 것이었구나. 교과서 한 줄을 읽을 때면 특별한 감흥 없이 밑줄만 죽 그어놓고 지나가는 내용이었는데 살아있는 환자는 그 한 문장을 아프게 겪고 있었다. 교과서에 적힌 한 문장이 생생하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허둥대지 않고 갑티슈에서 휴지를 뽑아 울고 있는 환자에게 건네며 걱정이 많이 되시겠다고, 오늘 진료 받으면서 어떤 이유로 두근거림이 찾아오는지 알아보자고 말해주었다.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착잡했다.
의학을 공부하며 의학의 역사 속에서 수십억의 사람들이 남기고 간 통계를 읽고 배우고 익힌다. 수천 개의 KMLE 국가고시 문제들을 풀면서 스쳐지나간 증례 속 환자들에게도 그들의 삶의 있었을 것이리라. 환자를 볼 때 확률만 읊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라는 말을 들어도 그 희박한 확률에 걸린 사람이 운 나쁘게도 본인이라면 일반적으로는 낮은 확률이라는 말이 무슨 소용일까. 당사자의 세상에서는 백프로인 것을. 환자가 경험하는 세상은 내가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세상과는 다를 수 있다. 교과서의 한 문장 속에는 실제로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실존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미래의 의사가 된 나에게,
아직 의사가 되지도 못한 나는 벌써부터 수백 명, 수천 명의 환자들이 거쳐가면서 점점 무뎌질 모습이 두렵다. 내가 무감각해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면 아무것도 몰랐던 환자의 모습이었을 때를 곱씹어 보자. 병원이 낯설고 두려운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의사일 수 있기를, 차트의 행간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환자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는 의사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