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또 기다리는 편지’의 첫 구절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정호승 시인의 이 시가 모의고사 국어 시험의 지문으로 실렸다. 평소 같았으면 눈대중으로 시를 쓱 훑어만 보고 ‘출제자의 의도’를 추측하여 재빨리 문제풀이를 마쳤을 텐데. 너는 그때 남은 문제를 풀기에 시간이 촉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읽은 시를 읽고 또 읽고 있었다. 결국 남은 문제들을 제대로 풀지 못했고 뒤의 문제들을 줄줄이 틀려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담임 선생님의 질문에 너는 깜빡 졸았다고 변명해야만 했었다.
이때부터였을까. 정호승 시인의 시가 좋았다. 그래서 종종 정호승 시인의 다른 시들을 찾아서 읽곤 했다. 유명한 시들이 정말 많았는데 유독 ‘슬픔’을 주제로 한 시가 많았던 것 같다. ‘슬픔이 기쁨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슬픔에 대하여’, ‘슬픔을 위하여’ 등. 시인은 슬픔이 사랑보다 소중하고, 우리를 완성한다고 고등학생인 네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시적 화자인 ‘나’는 그늘과 눈물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고, 슬픔은 어루만질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슬픔’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던 것 같은데, 그 중 무엇이 사랑보다 슬픔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일까?
2030년, 오늘의 내가 생각하기엔 슬픔과 고통은 개인을 연약하게 만들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극복해냈을 때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픔이 자기발전의 발판이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아닌 타자를 향할 때 슬픔의 가치는 승화된다. 나의 슬픔과 고통이 남의 슬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나 자신만 챙기기에도 벅찬 세상에서, 쉽게 지나치고 외면할 수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은 관심들이 모여서 사회에, 인류의 역사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 가난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 등 세상에는 직접 겪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들이 있다. 물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슬픔과 고통의 형태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슬픔과 고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남의 슬픔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눈물이 있기 때문에 남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나의 그늘이 있기 때문에 타인으로 하여금 내 그늘 밑에서 쉬게 할 수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신체적 장애, 극심한 가난을 극복하고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는다. 나는 이것이 슬픔과 고통이 갖는 위대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2020년 11월 너는 본과 1학년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몇 달 전, 너는 잠깐 시간을 내서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퓰리처상 사진전>에 다녀왔다. 그곳에는 80년 남짓 동안의 퓰리처상 수상작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100점이 넘는 사진들 중 대부분에서 피사체는 전쟁, 폭력, 자연재해, 질병 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었다. 최루탄을 피해 두 아이들을 끌어안고 다급히 국경을 넘는 난민의 모습, 목숨을 걸고 달리는 그녀의 절박한 모습을 너는 보았다. 그 날 네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 사진을 통해 세계는 강경한 이민정책과 난민정책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베트남전 당시 한 마을에서 폭격을 피해 강을 건너는 가족들의 모습, 그들의 눈빛에 서려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이념의 대립이라는 명목 하에 일어나는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주한 사진들 속에는 누군가의 참혹한 고통이 담겨있었다. 이러한 고통들은 너의 마음을 무겁게 했고, 네가 감히 이해할 수 없을 고통들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렇게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은 같은 언어권이나 같은 공동체에 속해있지 않더라도 이를 마주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연민과 공감, 인류애적인 관심을 일으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2020년 본과 1학년 생활은 어떤지, 너에게 묻고 싶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비대면 교육 방식,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의학 용어들, 방대한 공부량 때문에 힘들거나 슬프지는 않은지. 곧 다가올 시험 걱정에 힘들지는 않은지, 정호승 시인의 ‘또 기다리는 편지’의 한 구절처럼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힘들어하고 있을 너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의 다사다난했던 의과대학 생활, 너의 슬픔과 고통이 모여 만들어낸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 이 모든 것들이 2030년의 네가 유능한 의사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줄 거라고. 지금의 너를 좌절하게 하고, 때로는 도망치고 싶게 만드는 너의 슬픔과 고통이 오늘날 가치 있는 것이 돼 있다고.
세상 어느 곳에도 고통 없는 곳은 없다. 2030년의 너의 진료실에도 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이 찾아와 있다. 진료실에서 너는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토닥여주고 있다. 의과대학에서, 병원에서 의사가 되는 길을 밟으면서 느낀 너의 크고 작은 아픔이 환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게 도와 줄 것이다.
고통은 그 크기와 정도가 모두 제각각이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따라서 세상은 절대 고통 없는 곳이 될 수 없지만, 개개인의 고통과 고통에 대한 관심들이 모일 때 세상은 고통을 치유하는 곳이 될 수 있다. 2030년 너의 진료실처럼 말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 환자의 슬픔과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도와줄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너무 힘들어 하거나 지치지 말기를. 지금 네가 겪는 슬픔과 고통이 너를 더욱 단단하게 하고, 앞으로 네가 마주할 환자들의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게 할 테니 말이다. 정호승 시인의 ‘또 기다리는 편지’의 마지막 구절처럼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한 날들이 곧 올 테니, 건강 잘 챙기고 2030년에 우리 만나길. 그 때까지 책임감 있고 유능한 의사가 되도록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