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다보면 자연스레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23살이 되어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달리 이해하고 인정하며 놓아주려 한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어린 시절의 무인도에서 벗어나 새롭게 항해를 시작하기를 바란다.
기억은 조금 멀어지듯이 지워져가지만, 어떤 기억들은 누군가에게 새겨진다. 기억이란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일 것이고, 또는 간직하고 싶은 어린 시절의 벽화일 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세상의 무너짐과도 같았던 그 사건은 오늘날의 나에게도 흉터로 남아있다. 그 사건으로 일어났던 일들을 나는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대생이라는 얕은 배움에도 그것이 우울증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이해한다.
어린 시절, 친구에 대한 기다림의 끝에서 그 기대가 혼자만의 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좌절했다. 그들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고, 기다리던 것은 오직 나뿐. 나는 테두리 밖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세상은 무너졌다. 수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어린 아이는 어느 날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 날 이후, 나에게 인연이라는 것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끈과 같았다. 누군가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고 그 불안은 나를 작아지게 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혹은 나를 위해 힘쓰지 않게 해야만 했다. 나는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누구 앞에서든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것을 나를 지키는 방패이자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만들어놓은 금이었다.
언제부턴가 당연하게 사용해오던 친구라는 말은,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나와 대화하는 누군가는 친구인가. 나와 무언가를 함께하는 사람은 친구인가. 혹은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친구인가. 나는 내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가 없었다기보다는 누가 친구인지 구분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모두에게는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았고, 그렇게 소거하던 나는 나의 중요한 사람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어째서 나는 나를 이어가는가. 돌아가는 삶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나는 챗바퀴를 돌며 침전하는데,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째서 살아가야하는가. 선생님에게, 부모님에게, 친구들에게 물었지만 나는 인정할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죽을 순 없으니까 산다.’라는 친구의 말만이 내 귀에 들렸을 뿐.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 어느 날들에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에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조용하지만 목소리가 좋았던 그 녀석과의 대화 이후, 그 친구와 함께 하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내게 밀려들어와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깃발이 되었다. 암스트롱의 깃발처럼, 척박하고 생소한 땅에 그는 나에게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이었다. 그는 한 번도 나를 귀찮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를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진지하게 그리고 침착하게 나와 함께 했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 감사한다.
또 한 사람은 내가 또 다른 상처로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자, 나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민감했고, 어머니의 말 한마디는 가시게 되어 내게 꽂혔다. 지금에서야 어머니의 말 한마디는 큰 가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고슴도치를 바라보면서도 최선을 다해준 어머니를 마주한다. 한결같이 내게 힘들지 않냐고 묻고, 괜찮다는 말에 안심하는 어머니께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게 된다. 그중에서 무엇보다도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행복 속에 살았고, 때로 그 행복이 나를 떠나가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붙잡고 누군가에게 손을 빌려가며 이렇게 살아왔음을 느낀다. 내가 행복해진 것은 자신의 많은 노력과 긴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그 노력들을 이어주고 함께 기다려준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자. 힘들었다고 되돌아 볼 때마다 나에게는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시간이 지나 꿈꾸던 그곳에 닿았다면, 노를 저었던 너와 바람과 파도가 함께 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노를 저을 힘이 없이 지친 날에 너를 밀어주었던 바람과, 때로는 놓쳐버린 노를 다시 네게 밀어주던 파도를 기억하자.
그리고 또 누군가가 흘러들어온다면 네가 밀려들어왔던 바다를 바라보며 힘껏 그를 밀어주기를, 그렇게 받은 것을 돌려주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