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 : 아름다운 귀환(歸還)

2021년 의대생 신문과 함께하는 의대생 글쓰기 공모전 당선작

2021년 의대생 신문과 함께하는 의대생 글쓰기 공모전 당선작
(주제 :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의학 전공 과목”)

대상 : 박유진(순천향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2학년) 제목 : 아름다운 귀환(歸還)

죽음(死, death)이란 건 무엇일까.

병원에서 의사가 땀방울을 흘리며 열심히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장면을 한번쯤 본적이 있을 것아다. 곧 삐이- 소리와 함께 의사는 사망 시각을 선고한다. 한개의 단조로운 음으로 이루어진 ‘삐이-‘ 소리는 의사가 죽음을 선고하기 위해 필요한 심장, 뇌 그리고 폐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연 이 소리가 인간의 죽음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고나 범죄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엔 병원에서의 죽음과 달리 정확한 사망의 원인을 알기가 어렵다. 사망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사망 시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때 주로 이용하는 것이 바로 ‘생활 반응’이다. 생활 반응이란 사망자가 살아 있을 때 생긴 반응으로, 시체에서 생활 반응을 본다면 그 소견은 생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법의학에서의 죽음은 생활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생명활동이 영구히 정지하여 소멸하는 그 시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연 이 한 문장이 인간의 죽음을 정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떠한 죽음이든, 사망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과정이다.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알아야 그 사망에 대한 책임을 부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법의학에선 사인이라고 부른다. 사인은 크게 질병으로 인한 내인사와 질병을 제외한 모든 원인에 의한 외인사로 나눌 수 있다. 이 사인을 분류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검을 하는 것이다.

부검을 통해 사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선 의사들이 사망진단서를 제대로 작성하는지가 관건이다.
평소 심근경색을 앓던 환자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목욕탕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온다면, 의사는 사망진단서에 사인을 뭐라고 적을까? 아마 외인사 혹은 사인불명보다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인한 낙상과 그로 인한 뇌출혈이 사인인 내인사로 적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 환자는 부검 결과 타살로 인한 외인사로 판정이 났다.
‘사인을 단정하지 않는 것’. 이것이 사망진단서 작성의 핵심이다.

“이 사람이 무엇때문에 사망했는지보다 왜 사망했는지를 생각해라”. 법의학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뇌리에 깊이 남은 말이다. 교수님이 이렇게 사망진단서를 강조하신 이유는 그만큼 사망진단서가 사인을 결정하는데 있어 상당한 효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망진단서에 쓰는 나의 한 글자 한 글자는 범죄를 은닉할 수도 아니면 의료행위를 범죄행위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사망진단서는 결코 가볍게 쓰여지면 안되며, 의사의 양심에 따라 신중하게 쓰여져야 한다.

사망 현장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단지 심근경색을 앓고 있었다고 해서 타살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병사라고 사인을 적는 것은 또 한 명의 억울한 죽음을 만들 수도 있다. 응급실에만 있던 의사는 추측도, 예단도 하면 안되며 유족들의 진술, 주변 정황보다 보이는 사실 그 자체를 먼저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의대에 다니는 나조차도 우리나라의 장례문화에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부검이라고 하면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데 부검은 범죄 피해자나 의료사고를 당한 유명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부검은 억울한 죽음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의사로서 환자의 죽음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실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법의학 수업이 끝나갈 무렵, 법의학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법의학은 단순히 시체를 부검하고 사인을 추정하는 학문이 아니었다. 법의학은 죽음 뒤에 숨겨진 억울함을 풀어주고, 다시 가족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며, 비밀에 감춰진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에서, 사람들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모든 것이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그 사건 현장에서, 희생자 신원확인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바로 부검 소견이었다. 부검 소견에 따른 치아 검사, 유전자 검사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지하철 속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 결과 사망자 192명 중 신원미확인자는 단 6명뿐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세월호 참사에서도 국과수의 부검 결과는 비록 살아서 돌아가진 못해도 희생자들이 다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 평생 평화롭게 살다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질병과 사고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고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불가피하게 희생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될 수도 있고 옆에 있는 지인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죽음도 그냥 넘겨버리지 않고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돌아가신 고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죽음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말이다….

우리말에선 죽음을 ‘돌아가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문득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일까 의문이 들어 어원을 찾아보니, 생각지 못한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었다.
한국엔 고대의 토속신앙으로 ‘칠성신앙’이 존재했다. 우리 조상들은 북두칠성을 하늘의 시계 삼아 숭배했는데, 인간의 생사를 관장하는 북두칠성에 따라 인간의 시간이 다 끝나는 순간 영혼의 고향인 칠성별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 때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조차 불로초를 찾아 헤맸던 만큼, 누군가에게 죽음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아가다’라는 말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그저 자신이 있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의사들은 병원에서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죽음이란 건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죽음이 존재하진 않는다.
죽음을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라 치부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엔, 그 죽음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하나의 단조로운 소리, 간결한 한 문장으로는 도저히 죽음을 표현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다.
죽음 앞에서 나는, 의사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그 죽음 이면에 존재하는 하나의 삶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길고 긴 여정의 끝이 아름다운 귀환(歸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