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 1: 삶과 죽음에 대해 배우다

2021년 의대생 신문과 함께하는 의대생 글쓰기 공모전 당선작

2021년 의대생 신문과 함께하는 의대생 글쓰기 공모전 당선작
(주제 :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의학 전공 과목”)

대상 : 구서윤(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2학년) 제목 : 삶과 죽음에 대해 배우다

어렸을 때 주위 어른들이 모든 일이 엊그제 일 같다거나 시간이 참 쏜살같이 간다는 말을 할 때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매일 달력에 X 표시를 해가며 기다리던 방학 날짜는 너무나도 느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하교 후 일과는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 나와 언니를 돌봐 주시던 고모와 동네 뒷산의 약수터에 가는 것이었다. 하루 하루가 이렇게 느리게 가는데 어른이 되려면 도대체 산을 몇 번이나 오르내려야 하는 걸까 궁금했다. 어느새 본과 2학년 막바지에 있는 나는 요즘 어릴적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처럼 ‘시간이 너무 빠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치열하게 수능 공부를 하던 고등학생 시절도 순식간이었지만, 대학에 입학한 후 예과 2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드디어 진정한 의학도의 길로 들어선다는 기대와 동시에 방대한 공부량에 대한 긴장을 안고 진입한 본과 생활도 어느새 중반을 달리고 있다. 입학 당시 본과 선배님들이나 현직 의사로 일하고 계시는 선배님들을 보면 정말 멀고 까마득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가 본과 2학년 생활도 마치고 곧 3학년으로 진급해 병원 실습을 할 것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예과 2학년 때부터 전공 과목을 수강해 본과 1, 2학년을 거치며 정말 많은 기초 과목들과 임상과목들을 수강했다. 먼저 생리학, 생화학, 약리학 등 기초의학 수업을 들으며 의학 지식의 방대함을 몸소 체험했다. 시험을 위해 매일 밤을 새며 고군분투 하였으나, 배우면 배울수록 확실하게 알 수 있던 것은 내 앎이 부족하고 얕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본과 1학년을 마칠 즈음에는, 비록 얕더라도 기초적인 의학적 지식들을 습득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본과 2학년에 진입해 처음으로 임상의학 과목들을 접했을 때도 배움의 과정과 시험 공부는 참으로 험난했으나, 나의 배움이 언젠가는 환자를 살리는 고귀한 일에 쓰일 것임을 체감하며 가슴이 뛰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난 4년간 나를 스쳐간 이 수많은 과목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과목은 무엇이냐 묻는다면, 카데바 해부실습이 포함되었던 해부학과 호스피스 완화의학에 대해 배웠던 종양학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차의 조수석에 타면 차창 밖으로 정수리조차 보이지 않는 키의 꼬마였을 때부터, 나는 죽음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들을 던지는 꼬마에게 돌아오는 것은 나의 질문이 그저 귀엽다는 듯한 웃음과, 적당히 얼버무리는 대답이었다. 이제는 운전석에 앉아 차를 운전하는 나이가 된 지금의 나는 아직까지도 그 빈도와 깊이는 다르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 후 자신의 몸을 의학적 가르침과 연구를 위해 기증하신 분들을 맞이한 해부학 실습에서, 또 자신의 여명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행하는 완화의료에 대한 배움에서,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지난 명절, 가족이 다 함께 할머니댁을 찾았다. 매번 언니와 나의 일상과 학교생활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끊임없는 질문 공세를 간신히 끊어낸 우리는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다보니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의 첫 만남이나 어렸을 적 겪으신 전쟁이야기까지 나왔다.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할아버지께서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80년을 넘게 살았다는게 믿기지가 않아’라고 말씀하셨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며칠동안 그 순간 할아버지의 말씀과 표정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해가 거듭할수록 빠르게 흐르는 시간속에서 어느새 아이였던 내가 성인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중년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시간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나에게 닥쳐오면 얼마나 두렵고 허무할까?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나눈 후 문득 노화에 대하여,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하여 다시금 깊이 고민해보게 되었다. 유명한 대학 교수들이나 철학자들이 지필한,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하던 한 책 속 구절이 생각난다. 삶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니, 어쩌면 너무 허무한 일처럼 들리겠지만, 우리 삶의 유한함을 자각하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이어지기에, 죽음은 우리에게 가치있는 삶을 고민하게 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는 것일까? 도킨스의 말처럼 우리가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의 단순 숙주로서 기능하며 모든 행동이 궁극적으로는 종의 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타적인 행동과 결정들을 한다. 때로 이는 우리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행동일 것이고, 세상을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이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단지 우리 주위에 있기에, 나에게 행복을 주기에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어서 ‘나’라는 존재가 배제되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온전히 행복하기를 바라고, 내가 없더라도 우리는 세상이 아름답기를 원하며 때로는 어떠한 과학적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타적인 행동과 선택들을 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본과 1학년이 되어 해부학 실습을 하며 죽음의 과정에 나를 대입하고 투영하면서 감히 그 깊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람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우리의 서툰 칼날에 자신의 몸을 맡기신 기증자 분들은, 생전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위하는 것을 넘어서 얼굴도 모르는 후대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앞으로 그들을 살리는 매개가 될 우리들의 가능성을 믿고 당신들의 몸을 맡기신 것이다. 해부학 실습 내내, 마주하는 한 분 한 분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게 가치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증자분들의 깊은 뜻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배움에 임하고자 했다. 실습을 통해 생의 마감 이후로도 한 생명으로 인해 이어지는 생명들에 대해, 그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사유하고 감동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

본과 2학년이 되어 배운 많은 임상과목들은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의 한 가운데 있는 학문들이었다. 골든타임 내에 내원한 뇌경색 환자가 스텐트 시술을 받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는 케이스를 보았다. 칼에 찔리거나 공사 현장에서 추락사고를 당한 환자의 내부장기 출혈을 진단해 응급처치로 출혈을 막고, 뼈를 다시 맞추며, 재활을 통해 환자를 치유하는 케이스를 공부하며 현대의학의 위대함을 느꼈다. 하지만 암을 비롯한 많은 질환들 앞에서 현대의학이 무력해지는 케이스들을 마주할 때는 앞으로도 의학이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많음을 배울 수 있었다. 신경과를 배우면서는 의학이 단순히 고통 경감과 연명뿐만이 아닌, 환자와 함께 환자 본인의 유의미한 삶에 대한 고민에 함께하는 일이라고 느꼈다.

종양학과 호스피스 완화 의학을 배우며 의사의 역할은 ‘환자를 살리는 것‘을 넘어서 환자의 ‘어떻게 죽을것인가’하는 고민에 함께하는, 환자의 여생이라는 배에 동승해 남은 항해를 돕는 조력자라고 생각했다. 의대에 입학해 배운 수많은 과목들 속에서, 수많은 질환들을 배웠고 질환의 기전과 치료법에 대해 배웠다. 수업 시간에 배운 병은 치료해야 하는 것이고, 죽음은 의사의 지식과 기술을 연마해 최대한 회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과목, 즉 죽음을 회피해야 할 현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과목은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종양내과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호스피스 완화의학을 배우며 죽음을 마주하고 인정한 채로 의사가 하는 일들에 대해 배웠다. 수업을 통해 의학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완치에 대한 기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의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의학은 질병의 연구와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만, 결국 질병을 가진 개인을 치료하는 학문이다. 마지막까지 환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 수 있게, 원하는 방식으로 끝맺을 수 있게 돕는 것도 의사의 역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인상깊은 가르침이었다. 또 수업을 통해 인간다운 죽음은 무엇인가 고민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로서, 또 영속하지 못하기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할 한 인간으로서 나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고민해보았고, 이는 누구에게나 평생의 숙제라고 생각했다.

의학은 그 어떤 학문들보다도 빠르게,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지금껏 내가 배운 지식은 몇 년 사이 낡은 지식이 될 것이고, 일부는 완전히 틀린 지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해부학 실습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생명의 가치를 창조해 낸 분들에 대한 나의 감사의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고, 앞으로 그분들의 기대에 부응해 끊임없이 배우는 의사가 될 것이다. 호스피스 완화의학 수업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의사의 역할과 책임 또한 이후 의술을 행하는 나에게 한결같은 가르침으로 남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껏 의과대학을 다니며 내가 받은 가장 인상깊은, 평생 간직하고자 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