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 2: 삶의 면역력을 기른다는 것

2021년 의대생 신문과 함께하는 의대생 글쓰기 공모전 당선작

2021년 의대생 신문과 함께하는 의대생 글쓰기 공모전 당선작
(주제 :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의학 전공 과목”)

대상 : 지소희(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1학년) 제목 : 삶의 면역력을 기른다는 것

본과에 올라가서 첫 블록으로 배운 과목은 바로 면역학이었다. 아무래도 첫 블록이다 보니 밤새워가며 열심히 공부했고 그만큼 흥미도 많이 갔었던 과목이었다. 당시에는 왜 굳이 면역학을 본과의 첫 과목으로 설정한 것인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지만, 본과 생활을 1년 정도 보낸 지금에서야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아무리 질병과 치료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결국에 그 병을 이겨내고 회복하는 주체는 환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바로 환자의 면역기능이다. 면역이 너무 낮으면 쉽게 감염이 되거나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면역이 너무 높으면 자기 자신을 공격할 수 있어서 문제이다. 즉, 같은 질병에 대해 같은 치료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환자의 면역상태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마다 병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정도가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COVID-19에 걸려도 비교적 가벼운 증상만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면역계가 과다하게 활성화되는 사이토카인 폭풍이 발생하여 위중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가벼운 감기 바이러스일 뿐이지만, 운이 안 좋으면 심각한 상태로 진행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우리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 같다. 의사가 항상 본인의 치료에 100% 확신할 수 없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혈액종양학 수업을 들으며 교수님께서 만나신 다양한 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암이 발생하면 그에 맞는 수술, 항암, 혹은 방사선치료를 하는 게 당연한 상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과는 다르게 특별한 치료를 하지 않아도 자연치유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전에 TV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암을 자연치유로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당시엔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오히려 암 환자분들에게 괜한 희망 고문을 주는 게 아닌가 하며 반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 간에 있던 종양이 스스로 괴사하여 1년 후 물혹으로 변하는 등의 사례가 임상에서는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환자분은 진단 당시 중앙을 침범하는 심각한 암이 아니었고, 증상도 전혀 없으셨다고 한다) 이렇게 환자 고유의 면역기능으로 암을 치료하는 사례가 있는 반면에, 통상적인 항암치료를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암이 더 전이된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한 가지 더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는데, 급성백혈병에 걸린 어떤 환자가 폐렴에 걸려 장기간 삽관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균에 노출이 되었지만, 오히려 정상 림프구의 기능이 활성화되어 백혈병이 완치됐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야 환자의 면역력이 암에 미치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암의 자연치유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는 나의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병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 것이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면역항암제나 CAR-T 세포 치료제도 암세포 자체를 직접 공격한다기보단 환자의 T세포를 활성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암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수술, 항암, 방사선치료도 매우 중요하지만, 환자 고유의 면역기능을 활용하는 방안이 앞으로 더 중요하게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특히 항암치료만이 답인 백혈병 환자나 4기 환자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대두될 것이다. 사실 면역학이라는 과목은 임상의학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학생 입장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과목인 것이 현실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성적을 잘 받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이 과목을 왜 배우는지조차 생각해보지 않았다. 궁극적인 목표 없이 그저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계적으로 외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치료법들이 개발되기 위해선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환자에게 이 약을 처방하는 의사라면 적어도 이 약이 어떤 기전으로 우리 몸에 작용하는지 정도는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제목에서 ‘삶의 면역력’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의학 공부에 있어 면역학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바도 있지만, 면역학을 배우면서 우리의 삶과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적응면역을 담당하는 세포 중 T세포가 있다. T세포는 골수에서 생성되어 흉선에서 성숙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양성선택 (positive selection)과 음성선택 (negative selection)이라는 단계를 반드시 거친다. T세포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선 자기 자신의 MHC 분자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MHC 분자란 일종의 항원으로, 사람마다 고유의 MHC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할 때 매우 중요하게 쓰인다. 예컨대 장기이식을 계획할 때 MHC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고려해서 최대한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제 막 생성된 T세포 중에는 자신의 MHC를 인식하지 못하는 세포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사멸이 되고, 자신의 MHC와 적절히 반응하는 세포들만이 살아남는다. 이를 양성선택이라고 한다. 반면 음성선택은 MHC에 대해 지나친 친화력을 가진 세포들이 사멸되는 단계이다. 음성선택이 꼭 필요한 이유는 이러한 자가 반응성 T세포가 자기 자신을 외부 항원으로 인식하여 공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성숙한 T세포는 말초혈액으로 나와 비로소 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여기서 나는 T세포를 나 자신으로, MHC 분자를 내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로 치환해서 생각해보았다. 아직 22살밖에 먹지 않은 나는 미성숙한 세포이다. 나는 내 삶에서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연애, 우정, 인맥, 성적, 돈, 꿈, 명예 등등, 세상엔 수많은 가치인 MHC들이 존재한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다르므로 이 MHC를 통해 나와 타인이 비로소 구분되는 것이다. 현재 나는 나만의 MHC를 찾기 위해 사멸과 양성선택의 단계를 거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MHC와 반응하지 못하여 목적 없이 수동적으로 사는 나를 버리고, 능동적으로 나만의 MHC를 찾아서 인식하는 나는 살려두는 것이다. 양성선택 못지않게 음성선택도 매우 중요한 성숙의 과정이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삶의 균형, 다시 말하면 삶의 면역시스템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엔 아무래도 본과에 올라오다 보니 성적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학기 초반엔 성적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힘이 많이 들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돼버렸다. 나를 지키는 용도였던 T세포가 사실은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병적인 상황을 인식하고 난 후에야, 지나치게 집착하려는 성향을 내려놓고 어느 정도 타협을 보기로 하였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지금은 더욱 다채로운 삶의 가치들을 만끽하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그 증거이다. 나는 어릴 적에 글 쓰는 것을 좋아하여 한때 작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여러 이유로 꿈을 접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새로운 가치, 나만의 MHC를 찾아가는 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도 삶의 면역력을 열심히 기르길 바란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삶, 즉 의학이 목표로 하는 본질적인 상태를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이다!